001 전쟁과 평화 - 레프 톨스토이, 1869
002 1984년 - 조지 오웰, 1949
003 율리시스 - 제임스 조이스, 1922
004 롤리타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1955
005 음향과 분노 - 윌리엄 포크너, 1929
006 투명인간 - 랠프 엘리슨, 1952
007 등대로 - 버지니아 울프, 1927
008 일리아드 오디세이 - 호메로스, 기원전8세기
009 오만과 편견 - 제인 오스틴, 1813
010 신곡 - 단테, 1321
011 캔터베리 이야기 - 제프리 초서, 15세기
012 걸리버 여행기 - 조너선 스위프트, 1726
013 미들마치 - 조지 엘리엇, 1874
014 모든 것을 무너진다 - 치누아 아체베, 1958
015 호밀밭의 파수꾼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1951
016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마거릿 미첼, 1967
017 백 년 동안의 고독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1967
018 위대한 개츠비 - 스콧 피츠제럴드, 1925
019 캐치-22 - 조지츠 헬러, 1961
020 빌러비드 - 토니 모리슨, 1987
021 분노의 포도 - 존 스타인벡, 1939
022 자정의 아이들 - 살만 루슈디, 1981
023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1932
024 댈러웨이 부인 - 버지니아 울프, 1925
025 토박이 - 리처드 라이트, 1940
026 미국의 민주주의 - 알렉시스 드 토크빌, 1835
027 종의 기원 - 찰스 다윈, 1859
028 역사 - 헤로도투스, 기원전440
029 사회계약론 - 장자크 루소, 1762
030 자본론 - 카를 마르크스, 1867
031 군주론 - 니콜로 마키아벨리, 1532
032 고백록 - 성 아우구스티누스, 4세기
033 리바이어던 - 토머스 홉스, 1651
034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투키디데스, 기원전431
035 반지의 제왕 - 존 로널드 로웰 톨킨, 1954
036 곰돌이 푸 - 앨런 알렉산더 밀른, 1926
037 나니아 연대기 - 클리브 스테이플스 루이스, 1950
038 인도로 가는 길 -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 1924
039 길 위에서 - 잭 케루악, 1957
040 앵무새 죽이기 - 하퍼 리, 1960
041 성경
042 시계 태엽 오렌지 - 앤서니 버지스, 1962
043 8월의 빛 - 윌리엄 포크너, 1932
044 흑인의 영혼 - 두 보이스, 1903
045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 진 리스, 1966
046 보바리 부인 - 귀스타브 블로베르, 1857
047 실락원 - 존 밀턴, 1667
048 안나 카레리나 - 레프 톨스토이, 1877
049 햄릿 - 윌리엄 셰익스피어, 1603
050 리어왕 - 윌리엄 셰익스피어, 1608
051 오셀로 - 윌리엄 셰익스피어, 1622
052 소네트 시집 - 윌리엄 셰익스피어, 1609
053 풀잎 - 윌트 휘트먼, 1855
054 허클베리 핀의 모험 - 마크 트웨인, 1885
055 킴(Kim) - 루디야드 키플링, 1901
056 프랑켄슈타인 - 메리 셸리, 1818
057 솔로몬의 노래 - 토니 모리슨, 1977
058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켄 키지, 1962
059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어니스트 헤밍웨이, 1940
060 제5도살장 - 커트 보니것, 1969
061 동물농장 - 조지 오웰, 1945
062 파리대왕 - 윌리엄 골딩, 1954
063 냉혈한 - 트루먼 카포트, 1965
064 황금노트북 - 도리스 레싱, 1962
06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마르셀 프루스트, 1913
066 빅슬립 - 레이먼드 챈들러, 1939
067 내가 누워 있을 때 - 윌리엄 포크너, 1930
068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1926
069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 로버트 그레이브스, 1934
070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 카슨 매컬러스, 1940
071 아들과 연인 -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 1913
072 모두가 왕의 부하들 - 로버트 펜 워런, 1946
073 산에 올라 고하여라 - 제임스 볼드윈, 1953
074 샬롯의 거미줄 - 엘윈 브룩스 화이트, 1952
075 암흑의 핵심 - 조지프 콘래드, 1902
076 밤 - 엘리 위젤, 1958
077 달려라 토끼 - 존 업다이크, 1960
078 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턴, 1920
079 포트노이의 불평 - 필립 로스, 1969
080 미국의 비극 - 시어도어 드라이저, 1925
081 메뚜기의 하루 - 너대니얼 웨스트, 1939
082 북회귀선 - 헨리 밀러, 1934
083 몰타의 매 - 대실 해밋, 1930
084 황금나침반 - 필립 풀먼, 1995
085 대주교에게 죽음은 온다 - 윌라 캐더, 1927
086 꿈의 해석 - 지크문트 프로이트, 1900
087 헨리 애덤스의 교육 - 헨리 애덤스, 1918
088 마오쩌둥 어록 - 마오쩌둥, 1964
089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 윌리엄 제임스, 1902
090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 - 에블린 와, 1945
091 침묵의 봄 - 레이철 카슨, 1962
092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  - 존 메이너드 케인스, 1936
093 로드 짐 - 조지프 콘래드, 1900
094 모든 것과의 이별 - 로버트 그레이브스, 1929
095 풍요한 사회 -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1958
096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 케네스 그레이엄, 1908
097 맬컴 엑스의 자서전 - 알렉스 헤일리, 맬컴 엑시, 1965
098 빅토리아 시대의 명사들 - 리턴 스트레이치, 1918
099 컬러퍼플 - 앨리스 워커, 1982
100 제2차 세계대전 - 윈스턴 처칠, 1948

 

  이번에 뉴스 위크에서 선정한 세계 100대 도서 목록입니다. 주욱 리스트를 살펴보면 뭐랄까 북미권 위주의 리스트에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지만, 그래도 역시 달라질바가 없는 것은 제가 그다지 읽은 책이 없다는 사실이네요. 리스트를 보며 한번 체크를 해 봤더니 제가 읽은 책은 고작 10권. 반성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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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칸/취미와 가십 l 2009/07/04 23:18

일단 영화,

 

거북이 달린다 (2009)

오랜만에 본 정통 한국영화였습니다. ‘정통’이라는 말이 왠지 우습기도 하지만, 여태껏 대량 자본의 외국 영화나 소위 ‘Well-Made 한국 영화’를 주로 봐오던 저로서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화면비의 흐릿한 영상이었습니다. 나름 웃음코드를 유발하였던 것 같은데, 별로 웃기진 않았어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2007)

제대로 미친 케릭터를 보았습니다. 초반에 보안관을 수갑으로 목 졸라 죽일 때의 안톤 시거의 표정이란, 정말이지 대단했어요. 소름이 다 돋더랍니다. 그가 들고 다니던 무기도 참으로 매력 있더군요. 마지막이 아쉽긴 했지만 좋은 영화.

 

대부 2 (Mario Puzo's The Godfather Part II, 1974)

대부 1을 올해 초에 보고 이제야 2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왠지 서글퍼져요. 자신 주위의 모든 것을 잃고 외로워져만 가는 알파치노를 보면 더더욱.

 

트랜스포머 2 (Transformers : Revenge Of The Fallen, 2009)

1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미국 군사는 참 쉽게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1에선 국방장관이라고 모스부호 쳐서 보냈더니 전투기를 띄웠잖아요. 이번엔 레일건을 쏘네요. 아니 ‘강철 미사일’이었나요. 번역도 재밌고 영화도 재밌었습니다. 다만 왕십리 IMAX관 첫 번째 줄에서 봐서 눈이 핑핑 돌아갔어요. 뭐가 우리 편이고 뭐가 적인지.

 

이단 책,

 

죽음의 중지 (2009) - 주제 사라마구

눈먼자들의 도시에 반해서 읽었더만, 이건 뭡니까. 반만 읽으세요.

 

퀴즈쇼 (2007) - 김영하

김영하씨는 장편에 약한 건가요. 단편은 그렇게 재밌더만. 검은 꽃 이후로 맘에 드는 게 없습니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2008) - 움베르토 에코

학기 내내 이 책만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세욱씨가 번역해서 그런지 이윤기씨가 번역하신 책인 ‘푸코의 진자’, ‘장미의 이름’, ‘전날의 섬’ 등 보다는 읽기가 편하긴 했지만, 역시 아는 거 없는 범부로서는 범접하기 힘든 에코씨의 글. 여전히 각종 주석과 인용이 넘쳐납니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 (2007) - 요코미조 세이시

읽다 말았다 해서 등장인물들의 연관관계가 허물어져 뒤로 갈수록 골치 아파졌던 소설. 전 이렇게 사람 많이 나오고 배배꼬인 소설은 싫어요. 그리고 추리소설로서도 딱히 대단한 점은 못 느끼겠음.

 

이누가미 일족 (2008) - 요코미조 세이시

등장인물들 관계 꼬인 거는 ‘악마의 공놀이 노래’보다 한 세 수는 위인 것 같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봐서 괜찮았습니다. 이야기는 재미있고, 머리도 잘 굴렸고, 중심도 잘 맞췄지만 독자가 참여하는 추리소설이라는 점에서는 마이너스입니다. 팔묘촌부터 느낀 건데 요코미조 세이시씨의 작품은 추리 소설이라기보단 스릴러에 가까워요. 하기야 그러니까 그렇게 여러번 영화화, 드라마화 될 수 있었던 것이겠죠.

 

* 책의 ()안에 들어간 연도는 국내 출판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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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칸 l 2009/07/03 23:30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어머니상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요. 자식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시는 어머니? 따뜻하고 자애롭고 포근한 어머니? 아무래도 위와 같은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이미지의 어머니상이 우선 떠오를 것 같네요. 그런 어머니상은 많은 영화에서 관객의 눈물을 쏙 빼놓기 위해 사용되었고, 그게 얼마만큼 좋은 효과를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등장하는 영화의 기본적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봉감독의 영화에 나타나는 어머니는 어떤 모습일까요.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이전까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어머니와는 약간 다른 이미지의 어머니를 보여줍니다. 봉감독 영화에서의 어머니는 야성적이고, 본능적이에요. 자식에 대한 원초적인 사랑을 깔고 있는 어머니상이지요. 이런 점에서 김혜자의 어머니 연기는 영화의 역할에 있어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김혜자는 누가 봐도 이전에 말했던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어머니상을 평생에 걸친 연기 생활을 통해 구축해 놓은 인물이니까요. 영화의 전형 탈피는, 배우의 전형 탈피와 더불어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켰죠. 영화가 주는 신선함은 이러한 전형 탈피에 근간을 두고 있었습니다.

 

 

  도준의 어머니(김혜자 분)는 지극히도 아들을 아끼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녀의 사랑을 받는 윤도준(원빈 분)은 약간 정신이 모자란 아이죠. 그는 동네 양아치인 진태(진구 역)와 어울려 다니며 매일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만들어냅니다. 경찰서를 들락날락하는 어머니는 그러한 일이 매우 잦은 양 자연스러워요. 항상 무언가 사고를 치며, 경찰서 드나들기를 밥 먹듯 하는 정신적 연령이 성숙되지 못한 도준은,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 조건을 가지고 있었죠. 도준은 몇 가지 정황상의 이유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리게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도준이 범인으로 몰리는 것을 참고 볼 수 없었죠. 그녀는 도준의 범행이 기정사실화되며, 경찰도 변호사도 도준의 편에 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직접 진범을 찾기 위해 나섭니다.

 

  이야기 진행은 전형적인 봉준호식 영화 플롯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봉준호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아요. 정말 재미있는 만화책 한 권을 읽는 듯한, 이야기적으로 완벽한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진 플롯을 기초로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이야기는 발단이 있으며, 전개 과정이 있고, 그것이 극에 달하며, 마무리됩니다. 봉준호는 그 어떤 것도 애매하게 처리하지 않았으며, 관객은 가만히 앉아서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쫒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리 만만한 영화는 아니에요. 이 영화는 기존의 봉준호식 스토리텔링 구성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소품으로 치부하기엔 만만치 않은 영화적 기법이 녹아있습니다. 그건 영화 내에서 수없이 던지는 복선에 대한 문제에요. 분명 끝이 난 이야기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영화관을 나서며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을 겁니다. ‘마더’는 표면적으로 완결이 난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 봉준호는 모든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거든요.

 

 

  실제로 ‘마더’와 관련된 글들을 살펴보면 영화를 보고 온 관객들의 수많은 추측글이 난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관객은 속은 것이다.’, ‘사실 마더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범인은 그가 아니었다.’, ‘영화는 또 다른 복수극이다.’ 등등. 일반적인 영화가 1-2-3-4-5의 수순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봉준호는 그런 이야기에서 2와 4를 삭제시키고 남은 1,3,5에 복선을 집어넣었어요. 관객은 이야기의 모든 부분을 이해하고 극은 종결되었지만, 드러나지 않은 2와 4에 의해 영화는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게 되죠. 이 힘은 그냥 ‘그럴 수도 있겠네.’의 수준이 아닌, 정말 극 전체를 뒤집어 버릴 수도 있는 존재감을 지녀요. 다시 말해서 봉준호는 새로운 이야기 만들기의 한 국면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이제 봉준호는 그저 한국에서 무언가의 영화를 만드는 수많은 감독 중에 하나가 아니에요. 사람들은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등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봉준호가 풀어놓는 이야기 전개에 익숙해졌고, 친근감을 느꼈으며, 그것에서 재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객들의 관심은 이번 영화 ‘마더’에 ‘by 봉준호’라는 이름을 달게 만들었죠. 영화에 이름을 달았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해요. 저 이름표는 이 영화가 그저 수많은 한국 영화중의 하나가 아닌, 정말 ‘봉준호’만의 색체를 지닌 영화를 내놓았다는 감독 자신의 존재 증명의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박쥐’와 ‘마더’를 같은 수준의 난해한 영화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둘은 전혀 달라요. ‘박쥐’가 영화적, 영상 기법적, 상징적 방식을 통해 영화를 만들었다면, ‘마더’는 이야기와 플롯 구성의 방식을 통해 영화를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봉준호 만의, 자신의 능력을 한껏 집약시킨 영화라는 겁니다.

 

 

  대단히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해요. 이 영화는 그저 단순한 ‘스릴러’적인 측면에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저게 반전이야?’, ‘그럴 줄 알았어.’와 같은 시선으론 영화의 내면까지 들여다보지 못해요. 전체를 보는 거시적 시각에서, 봉준호가 내놓은 퍼즐 하나하나를 짜맞춰 보았을 때, 그제서야 관객은 봉준호의 치밀한 완벽주의를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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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칸/영화 l 2009/06/06 13:27

 

터미네이터라고하면 SF영화사에 있어서에 상당히 큰 무게가 실려 있는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하나의 신드롬이었고, 혁명이었죠. 스카이 넷은 이젠 고유 명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영화에 관심 없는 사람도 아마 ‘존 코너’의 이름은 알고 있을 거예요. 그만큼 터미네이터 1,2가 보여주었던 미래상과 연출은 충격이었죠.

 

그렇기에 관객들은 ‘터미네이터’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 어느 정도의 기대감을 안은 채 영화관을 찾게 됩니다. ‘터미네이터 3’가 대 실패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으로 ‘터미네이터’라는 이름의 기대치를 낮출 수는 없었던 것 같아요.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이 주목을 받았던 것도 ‘미녀삼총사’의 맥지 감독이 감독을 맡아서가 아니고, ‘다크나이트’의 크리스챤 베일이 주연을 맡아서가 아니고, ‘터미네이터’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하지만 이전까지의 ‘터미네이터’와 새로운 ‘터미네이터’는 그 진행 방식에 있어서도 큰 차별을 뒀어요. 이미 주지사님이 나오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만큼의 존재감을 가지는 터미네이터를 만들지 못하는 상태에서, 스토리의 변경, 이야기 구조의 변경은 어느 정도 필요했던 사항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네요.

 

영화는 언제죠? 2018년인가요. 어쨌든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모두들 알고 계시다시피 인류가 만들어놓은 스카이 넷은 자체적으로 진화를 해, 인류에게 핵을 퍼부어 인류를 멸종시킵니다. 하지만 인류가 다 죽은 것은 아니었고, 몇몇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죠. 스카이 넷은 그들을 찾아 죽이기 위해 터미네이터라는 로봇을 만들어 색출작업을 하죠. 인류는 저항군을 조직하여 그런 스카이 넷에 대항하는 활동을 펴죠. 그런 반란군의 미래의 지도자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존 코너(크리스찬 베일 분)’라는 인물입니다.

 

 

스카이 넷은 새로운 병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인간들을 수집합니다. 스카이 넷 본부엔 생포된 인간들이 다수 갇혀있죠. 저항군은 그들을 구출하고, 스카이 넷 본부를 파괴하기 위해 침입했다가 결국 존 코너를 제외하고 전멸을 하게 되죠. 하지만 그 곳에서 저항군은 터미네이터들을 스위치 OFF시킬 수 있는 시그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보에서 존 코너는 자신의 아버지 ‘카일 리스’의 이름을 듣게 되죠. 카일 리스는 존 코너의 어머니 사라 코너를 보호하기 위해 미래에서 보내졌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죽게 되면 존 코너는 미래에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리죠.

 

터미네이터엔 항상 우리의 터미네이터가 존재해왔죠. 이번 작에선 마커스 라이트(샘 워싱턴 분)이라는 터미네이터가 등장합니다. 그는 ‘심판의 날’이전에 살인 혐의로 복역하다가 자신의 몸을 연구 사업에 기증하죠. 그는 자신이 죽고 난 후 수 많은 시간이 흐른 2018년에 깨어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사람이라 믿고 있죠. 그는 정처 없이 떠돌던 중에 카일 리스를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행동하다가 카일 리스가 인간을 수집하는 터미네이터에게 잡혀가는 것을 묵도합니다.

 

그는 카일 리스를 찾으러 가려 했지만 알고 있는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터미네이터와의 싸움 중에서 그가 도와주었던 블레어(문 블러드굿 분)의 안내를 받아 저항군의 기지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그가 사실은 기계였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죠. 존 코너는 기계의 모습을 한 그를 믿지 못하고 적으로 간주하지만, 마커스는 카일 리스의 위치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고 존 코너에게 있어서 마지막 열쇠였습니다. 결국 존 코너는 마커스를 풀어주고 그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전 터미네이터 스리즈와 큰 구도는 동일합니다. 스카이 넷의 터미네이터와, 인간과 그를 보호하는 우리 편 터미네이터의 싸움이죠. 하지만 이번 작에서는 전 작들을 대변하던 난공불락의 수준을 가진,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터미네이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주지사님이 현역 때의 모습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영화의 전반부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전작의 터미네이터들보다는 아무래도 그 무게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이번 작에는 수많은 터미네이터들이 등장하고 그 수많은 터미네이터들은 많이 나오는 만큼 쉽게 죽어갑니다. 절대적 존재에 대한 공포가 중심을 이루었던 전작하고는 다른 길을 걷죠. 그리고 그만큼 영화는 긴장성이 떨어집니다. 영화는 전작과는 달리 평범한 블록버스터로 변해버렸어요.

 

 

눈요기는 충분합니다. 지금까지 본 CG중엔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기계들의 무게감이 대단하더군요. 돈을 쏟아 부은 만큼 화면상의 가치는 충분히 빛을 발했습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시나리오는 턱없이 형편없었어요. 유치하고. 대사는 있어 보이지만 이야기의 논리성이 조금 어긋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상황에 대한 감정이입은 되지 않고, 그저 존 코너는 미사여구만을 늘어놓을 뿐이었죠. 그에게 동조하는 여타 저항군들의 기분이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잘 만든 영화라곤 못할 것 같습니다. 펑펑 터지는 여름의 블록버스터를 보고 싶으시다면 봐도 상관없으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블록버스터 치고는 조금 졸릴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 유치함을 감수할 수 있어야겠죠.

 

덧, 마지막 장면을 보고 별주부전을 생각했다는 한 누리꾼의 말을 듣고 웃어버렸습니다. 정말 그렇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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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칸/영화 l 2009/05/31 12:32

 

이 영화가 등에 업은 것은 ‘천사와 악마’라는 네임벨류가 아닌 이미 몇 년 전에 뜨겁게 문화, 종교계를 달구었던 ‘다빈치 코드’의 유명세입니다. 원작자도 ‘다빈치코드’와 동일한 댄 브라운이고, 감독도 동일한 론 하워드이고, 주연도 동일한 톰 행크스가 나오는 상태에서, 2006년에 등장했다가 쫄딱 망해버린 ‘다빈치코드’를 들먹거리며 광고를 한다는 것은 ‘천사와 악마’라는 원작 자체가 크게 인지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의 반증이겠죠.

 

소설 ‘다빈치 코드’가 성공하고 영화 ‘다빈치 코드’가 망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댄 브라운 소설이 지향하는 흥미 제공의 방식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물론 ‘다빈치 코드’ 성공의 기저에는 소설에서 건든 종교적, 음모론적 색체가 깔려있지만 사실 그러한 설정이나 정보들은 종교를 전공하는 사람들이나, 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들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서점을 잘 찾아보면 그에 관련한 정보가 꽤나 많은, 결코 굉장히 신선하지만은 않은 소재거리였어요. 다만 ‘다빈치 코드’가 성공한 것은 그것을 풀어놓는 방법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빈치 코드’가 노리고 있던 타겟은 일반 대중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속칭 ‘지적 스릴러’와는 약간 다른 노선을 탔어요. 지식을 얻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상식이 풍부하고 지적 능력이 우수한 이들은 보통 여러 전공 서적이나 인문학 서적을 독파함으로써 정보를 획득하죠. 하지만 일반 대중들은 그렇지 못해요. 그들은 수준 높은 정보를 얻기엔 시간도 부족하고, 또 그것을 읽을 만한 능력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일반 대중들이 정보를 얻는 통로는 Tv와, 가십 잡지 정도죠. ‘다빈치 코드’는 바로 이 가십잡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낸 겁니다.

 

소설 ‘다빈치 코드’를 보면 정말이지 ‘있어 보이는’ 신기한 지식들이 넘쳐납니다. 학교에선 배우지 못했던 역사 뒷면의 숨겨진 비밀들이 펼쳐지지요. 소설에서는 기존 대중들이 가지고 있던 상식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이 기호학자 ‘랭던’의 입을 통해 정확한 근거가 존재하는 사실인양 떠벌여져요. 그리고 그 설명은 굉장히 쉽고 구체적입니다. 랭던은 절대로 어려운 어휘를 사용하지 않으며, 전문적인 지식을 펼쳐놓지도 않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서술방식은 충실히 가십 잡지의 그것을 따라가고 있어요. 제가 생각한 소설 ‘다빈치 코드’의 성공 요인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말을 조금 바꿔보면, 결국 ‘다빈치코드’의 성공 요인은 쉬운 정보 나열에 있었다는 것이고, 즉 그렇다는 것은 ‘다빈치코드’가 성공을 거둔 것은 그 소설에 내재된 특별하고 대단한 서스펜스나 그것의 서술기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빈치코드’는 결코 훌륭한 스릴러가 아닙니다. 그건 단지 재미있는 가십 소설일 뿐이에요.

 

여기서 영화의 패배요인이 드러납니다. 영화는 소설과 접근 방식이 다릅니다. 영화는 텍스트가 아니며 모든 정보는 시각화됩니다. 특히 대중을 위한 블록버스터 영화는 더해요. 대중을 위한 영화는 모든 것을 시각화해야합니다. 말이 길어지면 안되죠. 대중들은 설교를 들으러 영화관에 간 것이 아니거든요. 그럴 거면 책을 사서 읽고 말죠.

 

덕분에 영화는 갈피를 잡질 못합니다. 원작으로 쓴 ‘다빈치코드’의 시나리오는 절대로 대단한 스릴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대단한 영화가 튀어나올 것을 기대하는 것은 말이 안되죠. 영화는 뭔가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천사와 악마’에 대한 리뷰인데 엉뚱한 이야기를 길게 했군요. 하지만 저 말들이 그저 헛된 소리는 아니었어요. ‘천사와 악마’도 마찬가지거든요. 결국 ‘천사와 악마’또한 댄브라운의 그러한 ‘가십기사적 지적 스릴러’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바꿔 말해서 ‘천사와 악마’또한 재미는 있지만 훌륭한 시나리오는 가지고 있지 못했죠. 이러한 원작의 부실 때문에 영화 ‘천사와 악마’는 애초에 훌륭하게 재미있는 영화가 될 가능성을 차단당해버렸어요.

 

 

줄거리를 이야기해볼까요. 로마 바티칸에선 새 교황이 선출되는 의식 즉 ‘콘클라베’가 집행됩니다. 하지만 자신을 중세 과학자들의 집단 ‘일루미나티’라고 밝힌 세력에 의해 교황 후보 4명이 납치되고, 전 세계의 가톨릭 추기경을 비롯한 각종 인사들과 시민들이 모인 바티칸엔 반물질 폭탄이 설치되기에 이릅니다. ‘일루미나티’는 교황 후보 4명을 살해하고, 마지막엔 바티칸을 폭파시킬 거라며 협박을 해오죠. 결국 교황청은 저명한 기호학자인 ‘로버트 랭던’에게 사건의 해결을 부탁합니다.

 

뒷내용은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이 영화는 각종 성당과 그 성당에 관련된 정보들, 그리고 많은 상징과 기호, 그림, 동상 등을 바탕으로 다음 교황 후보가 죽을 곳을 알아내고, 살인범의 뒤를 쫒는, 그리고 반물질 폭탄이 위치된 위치를 추적하는 랭던의 뒤를 따릅니다. 그런 영화에요. 영화의 시나리오는 심각할 정도로 일방통행이고, 반전은 입에 담기도 싫을 정도입니다. 다만 이야기의 진행이 너무 허무맹랑하다거나, 앞 뒤의 이야기가 부실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댄 브라운은 타이트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법을 알고 있고, 뻔하고 간결하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서술하는 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눈이 그렇게 낮을까요. 어떻게 재미있게 꾸며놓은 듯한 스토리보드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뭔가 휑하게 마음이 뚫린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요. 교황을 찾아가고, 가보니 죽어있고, 교황을 찾아가고, 가보니 죽어있고, 그러다가 반물질 찾고 터질 뻔하고 터지고, 위기 모면하고, 해피 앤딩. 영화는 공식적으로 정형화된 깔끔한 이야기의 수순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요.

 

재미가 없습니까? 라고 물어보신다면, 기본적 재미는 충족하고 있다고 설명해 드리고 싶습니다. 생각 없이 보는 일방통행의 정형화된 시나리오의 깔끔한 영화니까요. 하지만 그 이상을 바라면 안되요. 솔직히 제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는, 쉽게 가지 못할 바티칸의 곳곳을 간접적으로 여행할 수 있다는 점에 그 의의를 줘야할 것 같습니다. 정말 영화 한편 보면 바티칸 여행 한번 제대로 한 듯한 느낌이에요. 눈요기로는 충분했습니다.

 

덧, 이 영화는 캐스팅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반전 영화라는 놈이, 캐스팅을 이따위로 해놓으면 안되지요. 이건 뭐, 관객이 바보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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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칸/영화 l 2009/05/30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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